보도자료

[세계일보] 일제 탄압에 맞선 3·1운동으로 자주국가 천명 [심층기획-위기에서 길을 찾다]

2025.01.02

[세계일보]

일제 탄압에 맞선 ‘독립의 횃불’… 3·1운동으로 자주국가 천명 [심층기획-대한민국, 위기에서 길을 찾다]


<1부> 한민족 국난 극복사
1회 - 자주독립운동의 역사

식민통치 시작되자 본격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해 무장투쟁 벌이고
사립학교 중심으로 애국청년 육성

임시정부 세우고 일제에 선전포고
연합군 일원으로 태평양전쟁 참전
미군과 국내 진공 작전 도모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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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원통한지고! 아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사천 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1905년 11월20일,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칼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었다. 한민족은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를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자 강하게 반발하면서 저항했다. 한민족은 1905년 을사의병에 이어 1907년 정미의병을 일으켰지만 압도적 무력을 가진 일제에 의해 학살됐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 상징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독립운동의 분수령, 3·1운동

1910년,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병합조약을 거쳐 식민통치를 받게 된 한민족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경찰 제도를 통해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국내에서는 안악사건이나 105인사건 등 일제의 거듭된 탄압에도 다양한 형태의 비밀결사를 조직해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독립운동을 도모했고,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통해 애국 청년들을 육성하려 했다.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는 한인촌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대표적인 독립군기지로는 삼원포와 북간도 용정촌, 봉밀산 한흥동 등이 꼽힌다. 이들 독립군은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거나 국내 진공을 시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벌어졌던 크고 작은 독립운동의 흐름은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으로 모아졌다.

경성 한복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곧 전국 곳곳으로, 해외로 퍼져갔고 한 달 만에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으로 확산했다. 참가자들은 한국과 한민족은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정정당당하게 선언하고 일제는 한반도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지극히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일제는 군대와 경찰 등 무력을 사용해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수원 근처 제암리에서 주민 30여명을 교회에 가둔 뒤 불태워 죽이는 등 제암리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제암리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큰 파문이 일자 책임자에 대해 가벼운 처벌만 하면서 사건을 은폐, 축소했다. 1년여 3·1운동 기간 살해된 사람은 7500여명, 부상당한 사람은 1만6000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6000여명에 달했다고,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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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비록 곧바로 독립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이후 각종 독립운동의 사상적 대중적 기반이 됐다.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사건으로도 기록된다. 강제병합 100년이 되던 2010년 일본의 총리 간 나오토는 담화에서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을 거론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민족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강제성과 불법성을 사과했다.

◆무장투쟁·의혈투쟁으로 이어져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기만적인 식민통치를 이어갔지만, 한민족은 독립운동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국내에선 실력양성론에 입각해 민립대학 설립운동, 국산품 애용운동,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으로 전개됐다. 무장투쟁도 본격화했으며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인사를 타깃으로 한 의혈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기타 독립군 연합 부대들은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승전보를 올렸다.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소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천주교 계열의 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부대들은 연합해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은 보복으로 한국인 마을을 습격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가옥과 학교를 파괴했다.

청년들은 1920년대 전반에 의열단을 조직해 조선총독부나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임시정부 산하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김구는 1932년 젊은 청년 이봉창을 일제의 심장부 도쿄로 보내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같은 해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훙커우공원에서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자 윤봉길을 보내 식장을 폭파해 많은 일본군 간부를 살상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서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한편, 한국인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군사와 노무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독립운동의 무게추는 해외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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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경성 특파원이 1919년 3월1일 서울 광화문 기념비문 앞에 운집한 군중을 촬영한 사진. 3·1운동은 자주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임시정부, 광복군 조직하고 대일 선전포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와 김구는 1940년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결성했고, 나중에 연합군 일원으로 인도·미얀마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일제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전 한국 국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전투 단위가 되어 추축국에 대하여 선전한다.

―1910년의 합병 조약 및 모든 불평등 조약은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의 한국에서의 합리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한다는 것을 거듭 선포한다.”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산하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김원봉 역시 1941년 중국 팔로군과 연합해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미군의 특수부대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 선언으로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이뤄지지 못했다. 비록 한민족 주도가 아니었더라도 ‘광복’은 자주독립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한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

출처: 세계일보(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999261?sid=102)

 

[세계일보]

“인류 모두 평등”…세계 평화 가치 분명히 해 

3·1 독립선언서 내용·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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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1919년 3월1일,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심의 민족대표 33인이 경성 태화관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인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천명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 권리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자결주의, 독립성만 강조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중략)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조선의 독립에 그치지 않고 동양 평화, 세계 평화의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인류애 정신과 비폭력 주의는 3·1운동을 종교계가 주도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민족종교 천도교를 대표하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먼저 뜻을 모았고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최성모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불교 지도자 한용운 등이 차례로 33인에 이름을 올렸다.

자주독립과 평화주의를 담은 3·1운동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현행 헌법 전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지금 다시, 헌법’의 저자(차병직·윤재왕·윤지영)는 “1962년 개헌 때 들어갔던 4·19와 5·16의 이념은 역사의 부침에 따라 삭제됐다가 다시 채택됐다가 했지만 3·1운동 정신의 계승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했다.
 
※인용한 3·1 독립선언서는 2019년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각계 감수를 거쳐 원문을 현대말로 풀어쓴 것입니다.

출처 : 세계일보(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999240?sid=102)